위스콘신대학교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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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4-13 16:20 조회4,4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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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위스콘신대학교

한국대표입니다!

오늘은 미국의 유명인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인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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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인이자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으로,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 과학자, 발명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 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해, "보잘 것 없는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국인"의 원조격 되는 인물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직업을 가졌던 벤자민 프랭클린이었기에 그의 인생을

직업별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


1706년 1월 보스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양초장이인 청교도 조슈아 프랭클린의 아들로

17자녀중 15남으로 태어납니다. 

글을 일찍 배웠지만 돈이 없어 학교를 2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형 제임스 프랭클린의 인쇄공 도제로 5년을 지내게 됩니다.

이때 시에 빠져 시쓰기에 열심이었던 벤자민에게 아버지가

'시인되면 평생 거지로 산다'라는 말을 듣고 시 쓰기를 접게됩니다.

1721년 형이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를 창간하자 다음해에

16살의 프랭클린은 신문에 기고문으로 14편의 사회평론을 작성하다가, 형 제임스가 쓴 글로

출간금지를 당하자 형은 벤저민에게 바지사장 격으로 신문 발행인을 맡겼지만 서로 트러블이 끊이지 않으며 곧 일을 접는데,

사이가 나빠진 형 제임스가 모든 동네 인쇄소에 벤자민을 욕하고 일을 못하게 해서 보스턴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정착해 인쇄업을 하던 프랭클린은 영국 런던에서 인쇄사업을 벌려서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1728년 인쇄소를 차리면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점점 사업이 커지면서 펜실베니아 지폐 인쇄권까지 얻게 되고 1729년 <펜신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합니다.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세계 최초로 만화를 삽입하고 도서관에 비치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여러 인쇄사업이나 사회사업을 벌리고 청교도적인 근면함과 저축으로 급기야는

부동산 투자를 할 정도로 큰 돈을 벌게됩니다.


발명가 벤자민 프랭클린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간 출판사업을 아예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헀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로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떄문에 운송비용과 목재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이니아 화로를 발명합니다.

이렇게 연구를 이어오다 1752년에는 비 오는 벌판에서 연을 날려가며 실험한 끝에

그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하게 됩니다.

연줄 끝에 금속제 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발견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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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에는 미국 우체국의 초대 우정공사 총재를 지냈으며, 그가 만든 시스템은 지금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요도용 카테터 발명자이기도 하며 물리학, 기상학, 해양학, 경제학 등에도 어느 정도의 발자취를 남겼으며

음악에도 능해 하프, 바이올린, 기타를 다룰 줄 알았으며 글라스하모니카를 발명했고,

직접 작곡한 현악 4중주 곡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의 발명에서는 대인배적인 면모가 돋보이는데, 화로나 피뢰침같은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합니다.


정치인 벤자민 프랭클린


1757년 정치에 입문해 영국에 파견되어 과세권을 땄고, 1764년에는 또 미국에 파견되어

인지조례를 철폐하며 일약 유명인사로 등극합니다.

여기서 했던 말이 그 유명한 "대표없이 과세도 없다."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2차 대륙회의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나가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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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랑스로 외교를 하러가 참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라파예트 등의 많은 프랑스 귀족이 미국을 지원하러 대서양을 건너가는 등, 큰 반항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 16세가 참전을 결의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사치스럽게 행동해서 비난받기도 했지만, 이게 프랑스 사람들의 호감을 사 성공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 중 영국에 붙잡힌 미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해적을 고용해 영국인들을 납치한 뒤 

교환하는 기행도 저질렀다고 합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같이 독립 전쟁 때 첩보 활동을 한 미국 최초의 스파이 입니다. 

난수 암호표와 해독 체계 역시 이 시기에 워싱턴과 같이 고안했습니다.

독립 후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합니다. 

그의 연설과 간행물, 책은 북미 식민지인들이 미국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해주었으며

미국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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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의 말년 


그는 중년부터 비만과 통풍으로 고생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흉막염으로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필라델피아에 워낙 기여를 한 면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굉장히 장수하면서 식민국에서 공화국까지 미국 초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존경을 받아 장레식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몰리게 됩니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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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은 미국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위인입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를 기리고자 10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를 넣었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미국 위인들 이야기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위스콘신대학교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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